마르크스-레닌주의(러시아어: марксизм-ленинизм, 문화어: 맑스-레닌주의)는 이오시프 스탈린 주도 하에 정립된 레닌주의 경제·사회·정치·철학 이론을 종합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이며, 근대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의 보편적인 공산주의 사상이다.
1920년대 당시 스탈린은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러시아어: 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을 비롯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각종 저서의 내용을 통일, 정립하였으며,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론을 레닌주의와 연계하여 소련과 코민테른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설을 세웠고, 그 결론으로 얻은 종합적 견해를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러시아어: Об основах ленинизма / Вопросы ленинизма)라는 강연을 통해 드러냈다. 그후 1935년 10월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은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과 공동 저술을 통해 공산주의 이론 종합 작업을 간명화(簡明化)하였는데, 그 결과로 저작된 책자가 바로 1938년 10월 1일에 출판된 『볼셰비키당사』(러시아어: Краткий курс истории ВКП-б)이다. 이 책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를 보편화시킨 동시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세계관 및 역사 해석을 공산주의적 세계관 해석의 통일적인 해석론으로 규정한다.이 용어는 오늘날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 시기에 행해진 세부적인 정책, 그리고 그의 레닌주의 해석법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소련의 정치가이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라자리 카가노비치는 이 의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러시아어: Сталинизм, 영어: Stalinism)와 같다고 하였으며,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하였다.
(1)의 의미에 기반하여,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에 이어진 수정주의 흐름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 의미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라는 용어와 구별될 수 있으며, 오늘날 제일 많이 쓰이고 있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도한 레닌주의 왜곡이라는 의미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같은 사상이며, 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레닌주의 해석을 비판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선호된다.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독일어: Revolutionärer Marxismus)의 연장선상에 속하며, 정통마르크스주의(독일어: Orthodoxer Marxismus)의 교조성을 극복한 사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인해 소련 내에서 수정주의 기조를 거치게 되었지만,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및 〈붉은교수양성소〉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학, 심리학, 역사학, 정신 철학, 정치경제학 등 여러 분야로 연구가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 및 동유럽 공산권 사회의 정신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으로는,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는 각각 호자주의, 마오쩌둥 사상, 주체사상의 형태로 반수정주의화(反修正主義化)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냉전 시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공산국가가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던 이념이며, 제3세계의 국가 정책 및 경제발전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현재도 반제국주의와 폭력혁명을 동반한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사상 체계이다.
== 개요 ==
카를 마르크스는 1845년 자신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에서 이전 청년헤겔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생산관계에 의해 발전되는 미래 사회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그것을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라고 칭하였다. 이 이후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지에서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상대는 프리드리히 헤겔이 주장한 절대정신(absoluter Geist)과 같은 이상적 상태이며, 그것은 현재적 의미에서 논해질 때 하나의 실현 가능성으로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청산하는 시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간을 상정하였고, 이 기간을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 대해 투쟁하는 최상의 열기가 존재하며, 동시에 그 싸움이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확정되는 과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 과정에 대한 해석에서 수많은 후대 공산주의자들의 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논쟁에 참가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져야 할 자세와 이들이 과도기적 단계에서 만들어나가야 할 사회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립된 이론과 테제는 훗날 레닌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레닌주의의 기반 위에서 1917년 혁명 이후 보완해야 할 점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계승된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시에 블라디미르 레닌의 인식론 저서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러시아어: Материализм и эмпириокритицизм. Критические заметки об одной реакционной философии)을 정리하였다. 이 저서는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하의 속류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동시대 경험주의적 유물론,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유물론을 정립하려고 했던 레닌의 의도로부터 쓰여진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계승하여 DIAMAT 교조를 수립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체의 유심주의, 기계주의, 기회주의 해석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현실 정치 측면에서도 수많은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탄생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세계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또한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자·농민·병사 위원회인 소비에트의 독재의 필요성을 서술했다. 이것은 현대 정치에서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그리고 혁명적 독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는 사회주의정치라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종교 문제에도 급진적으로 개입하여,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한 인민의 지도자 또는 수령의 독점적인 역할을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강조한 만큼 국민주권, 대의제, 법치주의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에 필적하는 대표적 사상이었다.
혁명에 대한 입장은 소위 ‘정통마르크스주의자'(Orthodox Marxist)라고 불리던 집단과 달랐다. 기존의 정통마르크스주의자 ― 소위, 칼 카우츠키를 신봉하는 ― 들의 경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 공황으로 인해 자본가는 최후의 선택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자들과 계급대립이 정점에 이르면서, ‘자발적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레닌주의자들은 이미 유럽의 자본주의 공황은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이미 러시아에 영향을 준다고 봤다. 자본의 팽창에 따른 공황, 그리고 그 공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국경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세계 단위로 이루어진다. 그 근거를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태동했던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자본주의 공황으로 인한 주위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혼란 조성을 예로 들었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그저 노동자 세력이 와해되거나, 유산계급에 헌신하는 국가의 무차별적 탄압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가 깊게 조명하지 못 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제도화를 계획했다. 이러한 면에서 레닌주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려고 했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레닌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스탈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와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공산주의라고 흔히 불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되었으며, 이 공산주의 이론은 많은 사회주의국가의 기반이 되었다. 김일성, 마오쩌둥, 엔베르 호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호치민 등이 이 이념에서 제시하는 국가 모델과 인식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 용어의 유래 ==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한 문헌은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1938년에 출간한 《볼셰비키당사》이다. 이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볼세비키의 사상은 러시아 내에서는 ‘레닌주의’, 러시아 외의 지역에서는 ‘볼셰비즘’이라고 불렸다.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영토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권은 점차 볼세비키당에 넘어가고 있었지만, 러시아 외의 유럽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넓게 볼 경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생디칼리즘에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하려는 일종의 ‘노동자주의’ 시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학설을 거부하는 마르크스주의 사조, 혁명의 불가피성 자체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 사조 등 다양했다. 이러한 학설 내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가한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제국주의 시대의 보편적인 마르크스주의〉라고 규정하였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내 수정주의 당파, 멘셰비키 잔류파,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학파, 정통 마르크스주의 학파가 레닌의 이론 해석을 부정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볼셰비키당으로부터 탈취하려 했는데, 스탈린의 해석은 이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 다음으로 스탈린은 레닌의 학설이 왜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이며, 필연적인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학설의 발전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에서 레닌의 정통성을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가 서로 이질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두 학설은 자본주의의 과도한 발전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제국주의라는 요소를 고려할 경우 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의 과학이자, 파괴의 기술이다.”라고 하였다.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레닌 사후 일어난 일련의 권력 투쟁 기간, 그리고 그 이후의 스탈린이 행한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성격도 존재한다. 냉전 시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흐루쇼프 이후의 수정주의까지 포괄한 용어였음에 비해,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해당 용어가 오히려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반수정주의와 강하게 연결성을 갖고 있다. 오늘날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스탈린 학설의 권위를 수호하려는 움직임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이 본래 스탈린의 정식과 학설에 기초하고 있다는 본질적인 성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다섯 가지 기본 전제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주의, 합리주의, 역사주의, 유물주의, 목적의식적 무신론을 철학 전개의 기본 전제로서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인식 논쟁과 그 해석은 모두 전거에 나열된 철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잇고 있다.
=== 근대성의 긍정 ===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근대성의 한 단면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근대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이루며, 마르크스는 근대성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비판 이론이 등장하고, 1960년대 말에는 후기구조주의가 등장하면서 근대주의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고,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한 축을 담당하던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주의의 영향력이 미미해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근대성과 완전히 분리해서 해석하는 경우나, 마르크스주의는 탈근대주의 담론에 적용하는 시도는 학술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러 권위적인 연구에 의해서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주의의 일종이라고 확고히 분류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정 철학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성을 긍정하고, 이것은 이전 시기와 완전히 비교될 수 있는 진보된 인류 정신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객관성, 인간의 합리적 사고, 인류의 편의를 위한 자연 개조 등을 중시하며,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근대주의의 전형이라고 여기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성을 긍정한다.결과적으로 인간 이성이 인류를 영구적인 자유로 인도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근대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소비에트 연방 철학자인 효도르 콘스탄티노프(Фёдор Константинов)는 근대 시기에서 근대성(модерность)으로 간주된 것이 부르주아 정신의 일종이었으며, 사회주의로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물질 생활이 개변하게 되면 근대성이 지양을 병행하며 확고히 유지된다고 하였다.
동시에 근대성은 특정 시기에 발현된 진보적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인데, 동태적 의미에서 새로운 형태인 모순의 등장, 다시 말하여, 생산 관계와 생산력의 모순 정도라는 측면에서 이전 사회보다 훨씬 감소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포함하여, 진리로 나아가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는 현대성(современност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대다수 관변 철학자들은 현대성을 논할 때 바로 위와 같은 정의에 기초하여 논리를 전개했다.
=== 일원론적 사변 철학 ===
현상와 현상 이면의 본질을 나누는 합리주의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을 물질의 존재 양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사변 철학으로 분류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유심론과 관념론에 반대하지만, 인간 이성 일반과, 감각 일반을 확고히 나누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인간 이성 일반과 감각 일반을 나누는 방식은 심리철학 영역에서 두 개념을 근본적으로 나누는 기준과 같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정신철학이며, 거의 모든 공산국가가 국정 이념으로서 정신철학을 강조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합리주의는 17세기 이후 근대 시기에 논해진 합리주의 철학 내 일원론과 이원론의 대립에서 일원론적 사변 철학을 전개한 셸링과 헤겔의 교의를 전제로 했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시작된다. 단, 19세기 말에 마르크스주의가 여러 방면으로 해석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오로지 사변 철학으로만 분류하기 어려워졌다. 195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구조주의, 비판 이론 등으로 해석되었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사변 철학의 궤도에 종속시키는 기조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헤겔의 사변 철학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에 논리 전개에서 기하학적 방식을 선호하고 명증을 성립하는 방법론으로서 연역론을 원칙으로 하고, 실증을 실천의 한 단면으로서 이해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30년대에 데보린 학파의 교의에 대해서 멘셰비키적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시작으로 형성된 스탈린의 사상 체계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사변 활동만을 강조하는 기조를 경계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스탈린은 사변 철학의 여러 전제를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일원론을 고수하고 있기에 정신 철학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유와, 인간의 기계적 행동을 일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이 변증법이라고 하는데, 이는 변증법을 사유의 주요 방법론으로 하는 일원론적 사변 철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정의하는 노동은 인간 해방을 통해 얻어진 완전한 사유 활동이며, 기계적 행동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노예 사회의 노예노동, 봉건 사회의 예속적 소생산과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력 산출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이성인 노동과, 완전한 노동으로까지 달성하지 못 한 상태를 고착하는 인간 내면의 수동성(기계적 행동)이 공존하여 일체의 모순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이는 냉전 시기 공산당이 무신론에 기초했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진리관과 선악 관념을 가지고 있던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도덕이라는 독자적인 도덕윤리의 구축을 가능하게 하였다. 과학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볼세비키 철학의 이러한 면에 대해 “신 없는 신학이자 초자연적 존재가 없는 종교”라고 평가하였다.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를 사변 철학의 틀에서 해석하던 거대한 흐름이 붕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제 노동 운동 이론을 지도하는 사령탑이 없어진 오늘날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사변 철학의 권위가 더더욱 약해졌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스탈린의 해석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사변 철학의 틀에서 해석할 것을 고수하고 있다.
=== 역사주의 사관 ===
역사적 사건 및 한 시대의 형성을 독립적인 개인의 합으로 보거나, 우연의 연속으로 보지 않으며, 추상적 법칙의 연속 또는 순환으로 보는 입장을 역사주의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본래 헤겔의 역사주의 담론을 받아들인 학설인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을 유물사관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전통에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 또한 역사주의 사관을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 입장으로 갖고 있다. 역사주의에서도 인간 경제 활동과 그에 따른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주요 변수로 보는 유물사관을 갖고 있다.
=== 유물론에 대한 반영주의 해석 ===
게오르기 플레하노프(Гео́ргий Плеха́нов)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계론적 해석을 차단한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헤겔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하여, 계급의식의 일반성을 규정하였다. 그의 저서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К вопросу о развитии монистического взгляда на историю, 1895년)은 레닌의 철학적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플레하노프의 반영론은, 기계적 운동과 인간의 의식적 사유를 나누는 양분론에 기초하여 세계를 바라본다. 여기서 의식은 물질로부터 도출하며, 물질은 자체적인 모순 정도에 따라 그 형상(形像)이 달라진다. 플레하노프는 물질의 현상적 특성을 규정하는 핵심 변수로, 그것 자체가 겪고 있는 내부 모순 정도라고 보고 있으며, 이 내부 모순 정도는 물질이 의식을 규정할 때, 그 도출되는 의식의 성격을 규정한다. 따라서 모순이 존재하는 물질 내부의 운동, 그리고 그 운동성에 따라 도출된 모순성이 존재하는 의식성이라는 두 가지 테마가 등장한다.여기서 플레하노프는 인간의 의식성은 바로 모순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을 정식화하고, 계급의식의 일반성을 바로 이 의식성을 통해 정의한다. 이에 따라 계급투쟁은 물질 세계와 의식 세계 전반의 모순을 최소화한다라는 목적의식성에 기초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플레하노프는 이 모순 최소화 과정의 구체적 사유 형태를 변증이라고 정의하고, 이 변증에 기초한 유물론이라고 하여, 스스로의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칭하였다.레닌은 플레하노프의 이 반영론 관점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가져야 할 유물론 사상이라고 인정하였고, 훗날 기계론자들을 비판하는 자신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을 크게 인용하였다.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재정립하면서 반영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 원리로 소개하였다.
=== 목적의식적인 무신론 ===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유(有)의 존재 양식으로서 물질을 설정하고 있다. 물질은 끊임이 없는 자기 모순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본질 운동을 드러내는 가장 기초적인 존재이고, 이러한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이러한 학설은 세계의 본질을 신이라고 규정하는 유신론과 반대되는 학설이며, 곧바로 무신론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일정한 생산 관계에 따른 인간 사유의 다양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추구하는 무신론은 단순 이론적 경향이나 학술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탄압, 종교 제거 운동, 문화 혁명 등 실질적인 조직 행동이 수반되는 전투적 무신론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이해되는 무신론과 구별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무신론은 또 다른 의미에서 본질자(끊임이 없는 모순으로 대표되는 유의 존재 양식, 그리고 이것의 총체적인 현실이라 할 수 있는 물질)를 상정하며, 물질이 내포하는 모순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목적의식적 무신론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 소부르주아적 소박실재론,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무신론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 경제 이론 ==
마르크스-레닌주의 경제 이론에 관해서는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1951년에 출판한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Экономические проблемы социализма в СССР)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서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다른 정치국 위원, 그리고 알렉산드르 일리치 노트킨(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Ноткин)을 비롯한 소련 과학원 경제 연구소 박사들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러시아어: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по планированию, 영어: GOSPLAN)의 경제 관료 사이의 토론 내용을 중점으로 사회주의 경제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다. 스탈린의 경제 구상은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레닌 사후 레프 트로츠키(Лев Тро́цкий, 1879 – 1940)와의 권력 투쟁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주로 좌익반대파의 ‘전시공산주의로의 회귀’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갔지만, 트로츠키 실각 이후에는 당내에서 니콜라이 부하린(Никола́й Буха́рин)을 필두로 한 우익반대파의 농업 자유화 이론을 비판하였다. 집권 후 1928년에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실시하면서 경제 정책의 토대를 쌓았다. 그리고 이 과정을 포함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이어진 일련의 경제 계획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종합하여 펴낸 저작물이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이다. 그는 이 저서에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의 특성, 그리고 생산력에 따른 경제사적 발전의 관계성 그리고 국유화와 집단농업화의 이로운 점과 주의해야 할 점을 서술해놓았다.
=== 계획 경제 ===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1장 「사회주의하 경제 제도들의 특성」에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일반적 특성을 규정했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특징은 〈중앙당 계획하에 진행되는 중앙집중적 사회주의 경제〉, 〈관료 조직에 대한 혁명적인 통제와 인민에 의한 지도 체계에서 진행되는 사회주의 경제〉, 〈소비와 공급량 조절 문제와 지역소비에트의 역량 강화〉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중앙당 계획하에 진행되는 중앙집중적 사회주의 경제〉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경제 발전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만약 생산력 발전에서 비약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해도 사회주의경제 발달을 불러오기 힘들며, 단기적인 성장만을 가져올 뿐인 정책이라면 그것은 중앙당의 경제 계획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 계획에서 첫 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그것이 정말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맞는 것인가?”부터 따져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관료 조직에 대한 혁명적인 통제와 인민에 의한 지도 체계에서 진행되는 사회주의 경제〉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 틀을 규정하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언급된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앙당의 계획이라는 본질적인 부분과 인민의 요구라는 현실적인 부분을 상호비판적으로 접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계획 경제하에서 나타날 수 있는 관료주의 문제와 생산의 편향성 등을 바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한 것이다. 관료제 자체의 경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갖는 무계획성과 비교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여 비교·분석하였다.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보다 높은 생산력과 빠른 발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 ‘국가 주도의 집중 투자’를 들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민간투자와 법인투자의 독자적 투자를 허용해놓고, 자본의 분산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자본가를 중심으로 투자 자본이 모이는 구조를 갖고 있기에 개개민간투자자는 안정적인 투자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따라서 소수의 독점자본의 성장만을 추동시킨다. 반면, 사회주의 경제는 관료 조직에 대한 효율적이고도 혁명적인 통제와 인민들의 통제로 이루어진 집중 투자 경제이다. 이는 집중 투자를 통해 공고한 ‘규모의 경제’를 재빠르게 실현할 수 있다는 점과 효율적인 분배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 외에도 제도적으로 공금금융과 지령 하달 경제의 장점을 논하고 있다. 세 번째 논점인 〈소비와 공급량 조절 문제와 지역소비에트의 역량 강화〉에서는 광범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통한 유통 속도와 균형성의 증가와 지역소비에트의 소비 및 공급 요구량에 따른 중앙의 상품 공급 방침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내용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국가 주도의 집중 투자를 통한 빠른 규모의 경제와 생산력 집중 실현.
관료 조직에 대한 혁명적인 통제와 지역소비에트를 통한 생산 하달 및 생산 요구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활용.
생산력 발전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생산 물품의 효율적 분배와 가격 책정.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독립국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특히, 1950년대 이후의 이집트를 포함해서, 1960년대 이후의 아랍 국가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경제론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높은 경제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것을 두고 “후진국을 신속하게 근대화와 산업화의 위기를 거치게 할 수 있는 검증된 능력.”이라고 평가했으며,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영어: Jawaharlal Nehru, 1889 – 1964)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획 경제에 대해 “자본이 빈약한 제3세계가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할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 생산력 이론 ===
생산력 이론적 견해는 본래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마르크스 사후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됐다. 특히, 러시아 혁명기 당시 멘셰비키는 이를 국내 생산력 발전에 한정하여 교조적인 경제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촉발될 수 있다. 이는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 – 1938)의 견해와 일치한 것이었다. 반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지구적 혁명론,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 등을 통하여 교조주의를 비판하였다.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에 따르면, 사회주의 형성의 객관적 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필수인 것은 사실이나, 자본주의 발전도에 따른 혁명의 격발성은 국경 및 특정 국토 단위에 한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이 오직 ‘자본주의 성숙도에 따른 기계론적인 혁명’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서 자본주의가 필수인 이유는, 자본주의 자체가 산업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창조하는 운명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생산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모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두 조건이 핵심이며, 이후 산업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의 모순성을 인식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기까지는 그들 스스로의 역량에 달렸으며, 당연히 자본주의 발전도에 따라 혁명의 열기는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것을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고 칭하였다.결과적으로, 멘셰비키와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계파 모두 단계론에 기반한 혁명론을 주장했으며, 전자는 기계주의, 후자는 실천주의라는 측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3장 「사회주의하 가치 이론」에서 드러나는 입장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실천주의에 기반한다. 사회주의경제는 노동력 산출을 통한 잉여생산 ― ‘자본가에게 이윤을 전유하는 잉여노동’은 ‘잉여가치'(독일어: Mehrwert, 剩餘價値)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이 자본가에게 모두 전유되는 자본주의적 착취 고리를 끊어낸 다음 얻어낸 잉여생산을 근로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며, 사회주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기초 위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Das Kapital)에서 밝힌 ‘이윤율 저하 경향’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주기적 공황’을 막는 데에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했으며,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에서 경제를 수호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6장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불가피성」에서 만약 자본주의국가가 위와 같은 치명적인 단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전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으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생산력의 지속성을 이유로 들어 생산력 이론의 견지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했음을 선포하고 사회주의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 감제고지 원칙 ====
‘감제고지’(러시아어: Командные высоты, 영어: Commanding heights, 瞰制高地)라는 개념은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경제 통제 방식을 비유하며 사용한 용어이다. 생산력 이론에 기반한 공산당의 경제 지도의 기본 원칙은 바로 이 감제고지의 원칙에 있다. 이는 생산력 발전 지도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내전 종전 후 소련의 산업 수준이 자본주의 국가의 산업 수준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체감하였다. 따라서, 생산력 이론 전제 위에 소련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본원적 축적'(독일어: Ursprüngliche Akkumulation)을 혁명적 당을 통해 이룩해야 한다는 경제 전술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바로 ‘감제고지’이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부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경제 정책으로서 실천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다.
소련에서는 그 첫 번째 시행으로 신경제정책을 들 수 있다. 이는 농업 부문에서 본원적 축적을 달성하려는 레닌의 첫 시도였다.
레닌 사후에는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좌익반대파에 가담했던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러시아어: Евге́ний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1886 – 1937)가 1926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새로운 경제학』(Новая экономика)을 통해 가장 가열차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농업 기반이 연약하던 소련 경제의 현실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급진적인 중공업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이오시프 스탈린 계파에게는 물론이고, 대다수 볼셰비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농민을 착취하여 본원적 축적을 빠르게 달성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계파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당했다.
농업 집산화가 완료된 시점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감제고지 이론에 따라 소련 사회주의 건설을 완성하였으며, 1936년 헌법 개정 때 사회주의 본원적 축적 과정을 완료했음을 공포하였다.
오늘 날의 대표적인 사례로 예를 들 때, 덩샤오핑 이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인민민주주의 정체로 규정하고, 본원적 축적을 당의 지도에 따라 감행해야 한다는 생산력 발전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들 수 있다. 즉, 개혁개방의 영향으로 부분적인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했으나, 감제고지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지기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기업은 모두 공산당 산하 국가개발기구의 지령을 받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제고지 적용은 각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구 소련의 경우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감제고지 정책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계획 경제 및 통제주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은 자신이 1998년에 펴낸 저서인 『The Commanding heights』에서, 누적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험성을 혼합 경제적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 할 경우 감제고지의 원칙의 도입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득세하여 자본주의 경제가 종식될 수도 있음을 논했다.
==== 일국사회주의 ====
일국사회주의는 선진유럽의 혁명이 없이 소련 국내의 생산력 증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산력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순수 소련 자력만으로도 세계 공산화를 이룰 수 있다.”라는 주장과 다르기에 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문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15년, 〈사회민주주의자〉 44호에 실린 ‘유럽의 슬로건’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정치·경제적 불균등한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몇몇 나라에서 심지어 한 나라에서 먼저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승리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를 수탈하고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한 후에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피억압계급과 함께 그 나라 자본가들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날 것이고, 필요하다면 착취계급과 국가에 반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것이다.
또한 1918년 5월 14일, 레닌은 모스크바 인민위원회 공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밝혔다.
모든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권력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현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혁명에서 멀어지고 스스로가 부르주아의 편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국내 혁명이 국제적 규모의 노동자 혁명을 기다려야 한다면, 모든 국가가 국제적 규모의 혁명을 기다려야 하며, 결국 그 어느 국가도 혁명을 이룰 수 없다. 이에 따르면 국제 혁명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923년 1월 6일 레닌은 『협동조합에 관하여』(О кооперации)를 통하여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정치 권력은 노동 계급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정치 권력은 모든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는 협동조합 사회에서 인구를 조직하는 것이다. 과거 계급 투쟁에 관한 행동이나 정치 권력을 위한 투쟁 등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이 ‘우아한’(legitimately)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인구가 협동조합을 조직함으로써 달성할 것이다.
이어서 레닌은 같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실로 모든 대량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 권력,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 소농 및 영세농과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의 농민에 대한 확실한 지도력 등 ― 이러한 것들이 협동조합으로부터, 오직 협동조합으로부터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과거에 협동조합을 장사치라 경멸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신경제 정책하의 지금도 그렇게 경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아직 이러한 것들은 완전한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필요 충분한 모든 것이다.
1938년 2월 14일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작성한 〈이바노프 동지에게 보내는 답장〉(Ответ товарищу Иванову)에는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불완전한 승리’와 세계 공산화(사회주의화)라는 ‘완전한 승리’를 구별하고 있으며, 일국사회주의는 전자에서 ‘불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기반하여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연록인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나온 글의 맥락을 더욱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전에는 한 나라에서의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는 부르주아지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나라 전부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연합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이제 이러한 견해는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조건하에서는 다양한 자본주의 나라들의 발전이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 제국주의 내부의 파국적인 모순들이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것,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혁명 운동이 성장한다는 것. ― 이 모든 사실로 인해 개별적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승리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스탈린은 같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한 나라에서 성립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투쟁력을 강화하고 농민을 지도하면서 승리한 한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최종적 승리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그 한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이 그 국가가 외국의 개입으로부터 자강할 수 있음을 완전히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몇몇 국가에서의 혁명 승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다른 국가의 혁명의 발전과 지원은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의 필수 과제이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룬다.”는 “(소비에트 연방 국내의) 사회주의의 건설을 달성할 수 있다.”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국제 혁명이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탈린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일국사회주의’는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불완전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 더더욱 명확해진다. 따라서, 일국사회주의론은 “순수 소련 자력만으로도 세계 공산화를 이룰 수 있다.”라는 것과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생산력 이론의 관점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국제 혁명의 지원이 없이 소련 내 생산력 증강은 불가능하며, 곧바로 국제 혁명을 지원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를 얻어내야 한다.”라는 레프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Теория перманентной революции)이 극좌모험주의에 속한다고 비판하였으며, 소련이 혁명의 병기창이 되기 위해서는 자력으로 생산력 증강을 꾀하여 사회주의 달성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잉여노동 ====
잉여노동(독일어: Mehrarbeit, 剩餘勞動)은 잉여생산물을 산출하기 위해 지출된 노동력 또는 노동을 의미한다. 즉, 잉여노동은 모든 경제·사회 발전의 기초가 되는 자본 축적을 산출하는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잉여노동은 노동자 일반의 추가적인 노동력 산출을 의미하는 용어로 흔히 쓰인다. 잉여노동은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성격을 갖는 잉여노동과, 착취 관계가 없는 잉여노동으로 나뉠 수 있다. 전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볼 수 있는 잉여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사회주의사회에서의 잉여노동이며, 이 상태에서 잉여노동은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더는 ‘노동력'(독일어: Arbeitskraft)의 산출이 아닌, 자연스러운 ‘노동'(독일어: Arbeit)의 산출로 정의될 수 있다. 이는 인간해방의 원천으로서의 잉여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노농동맹 노선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하에서 이뤄지는 소농의 노동력도 또한 필시 자본가 및 부농에게 이윤이 전유되는 형태를 보이고 있기에 전자의 성격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잉여가치 ====
잉여가치란, 자본주의사회를 포함한 수많은 착취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잉여노동의 성과를 자본가 개인 또는 경제적 기득권 집단에게 전유시킬 때의 가치를 의미한다. 잉여가치는 다시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로 나눠진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노동 시간을 높여서 얻어내는 잉여노동에 기초한 잉여가치를 의미하며,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사용되는 필요 노동 시간을 단축시켜 노동력의 가치를 열소화하여 얻은 잉여생산에 기초한 잉여가치를 의미한다. 즉, 자본주의사회를 비롯한 착취 사회는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식을 통해 기생하는 자들에 의해 운영되는데 바로 이러한 착취 고리를 끊고 잉여노동을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맞게 전환시키는 것이 생산 관계 혁명의 핵심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의 정치경제학에서 인정되는 자본주의하 가치 등식은 자본개, 임금재, 사치재가 서로 구분되지 않을 시 시간 변수
t
t
당 다음과 같은 수요-공급 가치 등식이 성립한다.
x
t
=
I
x
t
+
1
+
w
B
L
x
t
+
1
+
λ
x
t
{\displaystyle x_{t}=Ix_{t+1}+wBLx_{t+1}+\lambda x_{t}}
여기서 각 기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x
t
{\displaystyle x_{t}}
: 시간
t
t
까지의 상품 산출 벡터값
λ
x
t
{\displaystyle \lambda x_{t}}
: 자본주의국가 내 자본가들의 소비 벡터값
B
B
: 노동자의 생활필수품의 벡터값
I
I
: 상품들의 자본투입계수
L
L
: 상품들의 노동투입계수
w
w
: 실질임금이때 자본주의국가 내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행위로 인한 적정한 이윤율 상승 공식은 다음과 같다.
전년도 실질 경제성장률에 따른 상품 산출 벡터값을
x
t
=
x
0
(
1
+
G
)
t
{\displaystyle x_{t}=x_{0}(1+G)^{t}}
로 가정할 경우, 이윤율은
S
0
C
0
+
V
0
=
G
+
λ
(
1
+
S
0
C
0
+
V
0
)
{\displaystyle {\textstyle S_{0} \over C_{0}+V_{0}}=G+\lambda (1+{\textstyle S_{0} \over C_{0}+V_{0}})}
을 따른다. 이때 자본
k
k
는
k
=
V
0
+
S
1
V
0
{\displaystyle k={\textstyle V_{0}+S_{1} \over V_{0}}}
를 따르게 되면서, 이윤율이 증가함에 따라 잉여가치인
S
t
S_{t}
도 높아진다. 그러나
S
t
S_{t}
는 발달 정도에 따라 임금 삭감, 노동력 산출 가치 저하 등 여러 형태로 발현되고, 그 결과 상품 소비 계층의 소비력을 억제하게 된다.여기서 각 기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G
G
: 실질 경제성장률
C
0
C_{0}
: 불변자본(생산설비, 생산수단, 원료값)
V
0
{\displaystyle V_{0}}
: 가변자본(임금, 유동적 자본시장가격)
S
0
S_{0}
: 잉여가치이 식에 따라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는 이윤율 팽창을 위해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증식할 것이고, 그 결과 자본주의사회는 소비저하경향에 따라 이윤율이 저하하여 주기적인 공황을 야기하다가 붕괴한다.
=== 집산화 ===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10장에서 밝혔듯이, 집산화(Collectivization, 集産化)는 사회주의 경제의 핵심 개념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혁명적 당이 생산량과 생산계획을 통제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할 기초적인 경제 형태이다. 그리고 국유화와 집산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이후에야만 성숙한 사회주의 경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교육·의료·주거 3대 무상 원칙에 기초한 국유화는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행해져야 하는 주요 경제 투쟁에 속한다. 그것은 ‘집산화 투쟁’이라고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 국영기업 ====
자본이 국가에 귀속된 기업을 국영기업(State-owned enterprise, 國營企業)이라고 하며, 이러한 기업은 경영·경제 활동이 국가 기관에 의해 통제된다. 사회주의 국영기업은 단순히 국가 기관만의 통제가 아닌, 각 지역에 속하는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경제 조직의 통제, 그리고 혁명적 당의 통제라는 삼중(三重)의 통제를 통해 운영된다. 이는 사회주의 경제의 주요한 기업 형태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경제 집산화를 시작하였고, 이 결과 소련은 1934년 기준으로 국영기업이 전체 기업 비중의 93%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명목 GDP 규모는 1928년에 비해 약 2.2배 증가하였다. 1938년은 전체 기업 비중의 97%를 차지하게 된다. 붕괴 직전인 1990년에는 전체 기업의 80%가 국영기업이었다. 이는 다른 인민민주주의 국가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53년에 소련의 제1차 5개년 경제 계획을 모방하여 경제 국유화를 단행하였는데, 자국 기업의 해외 투자금과 외채를 비롯한 자산을 동결하고 대자본과 이에 딸린 공장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키는 급진적인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대자본가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자살하였지만, 그 결과 사회주의 경제로 나아가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또한 소생산자들, 중소기업가의 법인의 경우는 공동소유조합으로 전환하여 국가가 간접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주는 방식의 집체소유(集體所有) 상태로 전환하였다. 경제 계획이 완료가 되는 1958년 시점까지 연 평균 9%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였으며, 경제 국유화의 결과로 국유기업이 전체 경제의 89.17%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동소유조합이 10%를 차지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사실상 99%가 국가의 직간접적 통제하에 이루어지는 기업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81년 개혁개방 이후에도 국영기업에 기초한 산업 발전을 지향했다. 2019년 기준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20대 기업 중 12개 기업이 국영기업이며, 2018년 기준으로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간 98개 중화인민공화국 기업 중 약 90%가 국영기업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기업 비중의 95% 이상이 국영기업이다. 이를 통해 국영기업을 통한 산업집산화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의 원칙적인 경제 운영 방식이자, 일반적인 운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에서 국영기업은 단순히 국가계획기구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 내 노동자들과, 그 기업이 속한 지역의 지역민들의 민주적인 요구도 또한 기업 운영의 변수로 작용하였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제10장에서 이러한 국유화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집단 경영도 또한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국영기업의 모든 이윤을 국가 및 당 기구에 종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영기업의 이윤은 곧 국가 예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하 집산화는 국가자본주의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국가자본주의하에서 국영기업은 최대 주주인 국가 투자기구 외에 다른 주요 주주의 입김이 들어간다. 또한 국가자본주의적 국영기업의 이윤은 다른 주요 주주에게 분배된다는 점에서 전혀 인민의 소유라고 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집산주의와 주주자본주의의 원리를 존치한 상태에서 운영되는 집산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는 서로 지대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집단농장 ====
집단농장(Collective farming, 集團農場)은 토지국유제에 기초한 집산적 농업 생산체를 의미한다. 집단농장 정책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경제 계획을 내놓은 시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집단농장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토지국유제와 부분적인 토지공유제에 기초하며, 일체의 사적인 토지 소유를 금한다. 이는 불특정 다수에 의한 공동소유 및 개인 규모의 토지 임대를 금하는 것도 포함한다.
농업노동량은 각 국유 및 협동 농지의 특성에 따라 국가, 콜호스, 지역 농민의 공동 결정으로 책정하며, 농민은 정해진 기간 내에 콜호스가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워야 할 의무가 있다.
농민은 각자 할당 농지에서 생산한 농축산품을 모두 국가에 납품할 의무가 있으며, 이에 따른 합리적인 형태의 보상을 받는다.
콜호스 주 농지에서 생산된 농업 생산물의 사적인 판매 및 유통을 금하며, 개인 소농장에서 생산된 초과분에 대한 사적인 판매 및 유통은 허용한다.
농민은 언제든 할당된 토지에서의 임무 수행을 포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망하는 지역의 농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권리가 있다.
농민은 농업 활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것을 국가 기관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콜호스 관리국은 농업 작업 상황, 문제, 현안을 상급 기관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이 모델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1928년 회의록인 『곡물 조달 및 농업 발전 전망』(О хлебозаготовках и перспективах развития сельского хозяйства)에서 최초로 드러난 입장이다. 이 회의록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Аграрный вопрос и «критики Маркса»)에서 밝힌 노농동맹에 기초한 산업 발전을 위한 임금 문제를 농업 상품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보급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이 언급되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NEP 기간 당시에 부를 축적한 부자 농민들, 소위 ‘부농’을 해체하고 농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농민인 ‘빈농’에게 유리한 사회주의적 농업 구조인 ‘농업 집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동시에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의 신경제정책 고수론에 기반한 부농과 소농에 기초한 농업으로는 사회주의적 산업 발전을 이루는 농업 형태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했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말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
스탈린에 따르면, NEP식의 자본주의 농업은 부농의 농업 사보타주 행위를 막기 어려운 상태를 유발한다. 따라서 농산물 물가의 폭등을 불러올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를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스탈린은 이러한 상황이 바로 자본주의의 무계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1928년에 경제 계획이 단행되면서 콜호스(колхо́з)라는 집단농장 관리 체계가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간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를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농들은 작물을 태우고, 가축을 도축하여 농업 황폐화를 유도했다. 이들은 콜호스 관리들을 죽이거나 테러하는 것을 포함하여 수많은 방해공작을 자행하였으며, 콜호스에서 활동하는 빈농의 농지에 방화를 저지르고 가축을 죽이고 달아다는 등 빈농에 대한 테러도 저질렀다. 그 결과로 홀로도모르라는 기근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농업 집산화에 대하여 “이는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다. 여기서 빈농 계급이 승리하느냐, 부농 계급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사회주의 건설의 흥망이 결정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탈린은 빈농과 콜호스를 수호하기 위해 각 농지에 민병대 병력을 대거 투입하여 치안을 강화하였으며, 빈농 중 일부를 선발한 후 무장시켜 자체적인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는 부농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농업 집산화를 밀었고, 1938년에 완전한 농업 집산화를 달성하게 되었다.
시기에 따라 (3)과 (4)의 원칙이 수정된 적이 있으나, 소련의 농업은 기본적으로 위 여섯 가지 원칙 위에 선 집단농장 체계였다. 이리하여 농민은 농업노동자이자 농업공무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이러한 농업 집산화 정책을 기반으로 해서 1958년 인민공사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농축산물 무상공출제(無償供出制)에 기반한 소련의 콜호스와 달리, 인민공사는 농축산물 유상공출제(有償供出制)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후 인민공사는 개혁개방의 영향으로 1982년에 농업을 비롯한 경제 업무에 관한 권한이 모두 사라지면서 사실상 폐지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12년에 농업 개혁을 단행